'정'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한국인의 삶 속에서 정은 마치 공기처럼 존재해왔습니다.
2025년,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사회 속에서 정은 과연 어떻게 남아 있고, 또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요? 기술이 감정을 대신하는 시대, 한국인의 정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문화이자,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가치입니다.
사회적 연대: 정은 연결이다
정(情)은 단지 따뜻한 감정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정서적 끈이자, 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안전망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서로의 짐을 나누고, 같이 밥을 먹으며, 이름 모를 이웃과도 마음을 나누며 살아왔습니다. 2025년 현재, 팬데믹과 전쟁, 기후 위기 같은 전 지구적 사건을 거치며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욱 조심스러워졌고, 개인화는 심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연대감은 여전히 '정'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마음, 비오는 날 모르는 사람에게 우산을 건네는 손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이 모든 행동은 ‘도움’ 그 자체를 넘어서, 정서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연대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향해 손을 뻗고 있고, 그 속에서 정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정은 관계의 지속을 전제로 합니다. 단발적인 친절이 아닌, 시간이 쌓이며 단단해지는 것이 정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정을 주고받을 '시간'과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문화 유지: 정은 한국의 생활문화다
정은 한국의 전통 문화에서 뿌리 깊은 정서입니다. 농경 사회에서 마을 공동체는 하나의 가족처럼 지내며, 명절이면 온 가족이 모이고, 이웃과 음식을 나누는 풍습은 정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2025년의 한국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1인 가구가 40%를 넘고, 비대면 생활이 일상화되면서 전통적인 공동체 문화는 해체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정은 '형태'를 바꾸어 여전히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혼자 사는 이웃을 위해 반찬을 나눠주는 ‘도시형 정문화’, 반려동물 커뮤니티에서 서로를 챙기는 ‘비가족적 연대’, 청년들이 모여 무료급식이나 셰어하우스를 운영하는 모습에서도 우리는 현대적인 정서의 연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드라마, 영화, 예능 등 대중문화 콘텐츠 속에서도 정은 여전히 중심 테마입니다. '가족이 아니어도 가족처럼', '혈연이 아니어도 함께 사는 삶'이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한국인의 정서가 여전히 ‘관계’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은 문화의 일부분입니다.
그 문화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춰 변화하고 있습니다.
회복력: 정은 다시 일어서는 힘이다
정의 가장 강력한 기능은 바로 회복력입니다. 한국은 수많은 역사적 아픔과 고난을 겪어온 나라입니다. 식민지 시기, 전쟁, IMF, 팬데믹… 그때마다 한국 사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의 밑바탕에는 바로 '정'이 있었습니다. 정은 단순한 감정적 위로가 아닙니다. 상처를 감싸주고, 다시 살아갈 동기를 부여해주는 감정입니다. 친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내가 손을 내미는 이유, 가족이 아플 때 나의 시간을 내어 돌보는 이유, 심지어 낯선 사람에게까지 온기를 나누는 이유는, 바로 이 '정'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공감 피로'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감정 소모가 문제로 떠오르고 있지만, 한국인의 정은 단순히 감정을 쓰는 것이 아닌, 서로를 붙드는 지지 구조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점점 빠르게 움직이고, 우리는 가끔 그 속도에 지쳐 쓰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의 정은 멈추지 않습니다. 작은 친절 하나가 큰 위로로 돌아오고, 말없이 챙겨주는 누군가의 행동에서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이 주는 회복력이며, 2025년에도 그 힘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정은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합니다. 형태는 달라졌지만, 그 본질은 그대로입니다. 정은 관계를 잇고, 문화를 유지하며,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한국인의 삶을 지탱해온 이 아름다운 감정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다시 정을 나눌 시간과 여유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