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례허식은 ‘겉만 그럴듯하고 실속 없는 예절이나 형식’을 뜻하며, 오랜 세월 한국 사회의 관습과 깊게 얽혀 있던 문화현상입니다. 이 글에서는 허례허식이 어떤 사회적 배경 속에서 형성되고 지속되어 왔는지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조명하고, 최근 실용주의적 가치관의 확산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허례허식의 사회문화적 뿌리
허례허식은 단지 예의범절이 과한 수준에 이른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질서와 위계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이자, 체면과 신분을 드러내는 상징적 기호였습니다. 조선시대 유교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이래로, 사람들은 외형적 단정함과 예의범절을 개인의 인격 수준으로 판단했고, 이를 벗어난 자는 ‘몰상식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관혼상제와 같은 의례에서는 허례허식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결혼식에 들어가는 예물, 상례에서의 절차와 제례용품, 심지어 초상화와 묘비석의 규모에 이르기까지 형식이 중시되었습니다. 이는 단지 사치를 즐긴다기보다, 후손의 예의를 입증하고, 공동체 내 위신을 세우기 위한 ‘사회적 의무’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뿌리는 봉건적 계급질서와도 관련이 깊습니다.
상류층일수록 더 많은 예절과 절차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야 했고, 하층민도 이를 모방하며 문화 전반에 허례허식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또한 동양적 정(情) 문화 속에서 허례허식은 인간관계의 윤활유로 기능했습니다. 과도한 선물, 지나친 격식, 복잡한 인사 절차 모두 타인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관계 비용’이었으며, 단절보다는 유지에 가치를 두었던 한국인의 정서적 구조와도 맞물렸습니다.
외형 중시 문화와 허례허식의 심화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며 한국 사회는 급격한 도시화와 계층 분화를 겪게 되었고, 이에 따라 외형적 성공의 표상이 사회적 인정의 기준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허례허식은 이 과정에서 더욱 교묘하고 세련된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격식 있는 언어와 태도, 고급스러운 외모, 특정 브랜드의 소비 등은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라 사회적 성공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으며, 이는 곧 새로운 형태의 허례허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식에서는 축의금 액수나 예단의 수준이 결혼 당사자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기준처럼 기능하기도 했습니다. 장례식장 조화의 크기, 회식에서의 술값 계산 방식, 심지어 SNS 상의 명절 선물 인증도 ‘체면 유지’의 연장선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현대의 허례허식은 전통적 형식을 고수하기보다는, 자본주의 논리와 결합한 ‘과시적 소비’ 형태로 변모한 것입니다. 이러한 외형 중시 문화는 개인의 경제적 부담을 증가시키고, 본질적 관계보다 형식에 치우친 인간관계를 양산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사회적으로 경제 양극화가 심화됨에 따라, 허례허식은 단순한 문화 문제가 아닌 ‘사회적 위화감’을 조장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외형을 과하게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없는 사람’은 숨고, ‘있는 사람’은 더 과장하게 되는 왜곡된 경향이 사회 전반에 자리 잡게 된 것이죠.
실용주의 가치관과 허례허식의 쇠퇴
하지만 최근에는 실용주의적 가치관이 사회 전반에 빠르게 확산되며, 허례허식에 대한 비판적 인식도 점차 강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가성비’와 ‘진정성’을 중시하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보여주기식 소비와 형식적 관계를 지양하는 흐름이 뚜렷해졌습니다. 과거에는 ‘어른이 시키니까’ 따라야 했던 관습들이 이제는 ‘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아래 재해석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간소한 결혼식이나 셀프 장례식, 모바일 청첩장과 같은 간편한 의례 문화는 ‘간소하지만 진심을 담은 방식’으로 인식되며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한 명절이나 제사 문화에서도 고인을 위한 정성이 중요할 뿐, 격식과 비용을 기준으로 삼지 말자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허례허식에 대한 비판은 더 이상 소수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세대교체 때문만은 아닙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대면 모임의 축소, 디지털 소통의 일상화, 개인주의 가치관의 강화 등 사회 구조 전반의 변화가 허례허식 문화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형식보다 진정한 소통과 실질적 의미를 중시하게 되었고, 허례허식은 ‘구태의연한 문화’라는 인식 아래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허례허식은 오랜 시간 사회를 지탱해온 문화 코드였지만, 이제는 실용과 진정성의 시대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습니다. 변화를 거부하기보다, 그 속에 담긴 본질적 가치와 시대 흐름을 함께 읽는 것이 더 현명한 태도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 곁의 ‘형식’들, 과연 그것은 필요한가요? 이제는 물어야 할 때입니다.